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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나는 왜 불행한가?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7.06.30 14:40 수정 2017.06.30 02:32

조덕연칼럼-나는 왜 불행한가?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디지털 부안일보 
세상을 살다보면 존재의 가치가 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들도 많고 또한 존재하는것도 많다. 그런가 하면 다시 태어난 것 또한 많다. 골목골목마다 위치했던 라디오 수리점, 시장 입구에 자리했던 솜을 타던 공장, 아침마다 출근 전에 들러 달걀노른자를 올려주는 모닝커피, 큰길가에 의례히 자리잡고 있었던 공중전화 박스, 타자기, 삐삐, 모든 것들이 추억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IT산업이 버티고 있다. 그 세월이 먼것 같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가까운 시간에 사라진 것들이다. 중학교 때 일이다. 당시만 해도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이 촌마을에서는 한집 꼴이었다.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은 지식층이라 자부했던 시절, 그것도 매일 배달이 되는게 아니라 지국에서 사람을 통해 나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그 신문 나르는 일을 한다. 학교에서 귀가길에 지국에 들려 신문을 받아와서 전달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동아일보로 기억되는데 그 지국은 가축병원에 있었다. 매일매일 착실하게 신문배달을 하는 나를 병원장은 예쁘게 보았던 모양이다. 하루는 귀에 염증이 생겼음에도 병원은 생각지 못하고 그냥 버티며 지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가축병원장이 내 귀를 보더니 소독하고 주사놓고 깨끗하게 치료해준다. 덕분에 내 친구 몇 명도 데리고 가 치료해준다. 물론 무료 서비스였다. 그때는 그랬다. 병원문턱은 가지 못해 중이염으로 청력을 잃어버리는 일쯤은 비일비재였다. 어디 그 뿐이랴 위생 상태가 좋지않아 기생충을 달고살던 시절이었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보다 더 좋을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해택을 누리며 살고 있음에도 항상 자신이 불행하다 생각하는 이유는 어찌된 연유일까? 고등학교 때 일이다. 외가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던 시절 집 곁에 외할머니가 한분 계셨다. 그때 나이로 70세 정도 많이드신 할머니였는데 무엇보다 나를 예뻐하니 자주들러 이야기도 듣고 먹을 것도 얻어먹곤 했다. 그 외할머니가 며느리를 들였다. 그리도 좋게 보이던 외할머니가 며느리를 들이고는 싹 변해버린다. 며느리가 들어오니 식량이 너무쉽게 떨어진다고 노골적인 표현을 하신다. 양식이 귀한 시절 며느리는 양식을 축내는 나쁜 며느리가 되고 만다. 나는 할머니에게 이른다. ‘며느리가 들어와서 하루 일을 하면 그까짓 양식 열배는 살 수 있으니 예쁘게 보라’ 말을하니 웃으며 받아주신다.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이 좋은 세상을 항상 불만을 가지고 사는 연유는 무엇일까? 통계로 분석해도 이 시대를 사는 모두는 자신이 불행하게 살고 있다고 느끼며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194개국 중 수출 7위, 무역흑자 14위, 전력생산 10위,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등 모든게 상위권에 있으면서도 출산율 166위, 자살율 1위, 우울증 의심 56%, 헬조선, 7포세대, 흙수저 등 자기 비하에 빠져있음은 왜일까? 인간의 욕구는 한이없다. 남과 비교해서 뒤진다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불행의 길이다. 남과 비교하면 나은 점도 많지만 우리는 남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음에도 모든걸 다 우위에 놓으려는 욕심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첩경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불행으로 스스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불행의 적은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있다. 항상 웃으며 즐길수 있는 삶을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마음, 이것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주범임을 안다면 많은 생각할 것 없다. 그냥 즐기면 된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나날이 즐겁게 느낀다면 나는 행복하다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늘을 즐기자.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월등하게 올려놓자. 그저 사는 것이 즐거우면 그 인생은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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