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청도를 가다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7.01.24 14:39 수정 2017.01.24 02:44

조덕연칼럼-청도를 가다
 
ⓒ 디지털 부안일보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우리 국민들에겐 익숙한 노랫말이다. 온 국민이 잘살아 보자고 외치며 가난과 무기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마음으로 일어서게 했던 새마을운동이 반세기를 넘으면서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 메아리치고 있다. 1970년대 낙후된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버둥으로 새마을운동은 시작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 추진됨에 따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이농이 증가되는 낙후된 농촌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기에 농촌근대화를 위해 제시된 대안이 새마을 운동이었다. 1969년 8월초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지역 수해피해 현장을 시찰하던 중 재해복구와 마을안길, 마을뒷산 산림 가꾸기 등 마을전체가 잘 가꾸어진 신도리의 모습을 보고 열차를 중지 시켜 보고를 받는다. 추진 과정 설명을 듣던 중 온 마을 주민이 기왕 복구할 바에야 좀 더 잘 가꾸어 살기좋은 마을로 만들자고 마을 총회에서 결의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루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듬해인 1970년 4월 22일 지방 장관회의에서 농민의 자조 노력을 강조하면서 청도군 신도마을을 예로 들어 자조자립 정신을 바탕으로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새마을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지게를지고, 머리에 이고, 리어카를 끄는 등 주민들은 한 몸이 되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식량자급을 위해 생산량이 많은 품종을 개발해서 농민을 지도하고 때로는 강제해서 이끌어 가능한 일로 만들었던 운동이 새마을 운동이다. 60년대 우리 국민의 소득은 연간 10만원에 불과했다. 이 수익으로는 목구멍에 풀칠하기조차도 어려운 살림이었다. 거리에는 거지들이 떼를지어 굶주린 배를 채우려 득실거렸고, 희망이 없는 젊은이들은 맨날 하릴없이 빈둥거리거나 도박장이나 찾아다니던 시절, 더구나 온 국민의 건강은 기생충이 몸 안에 득실거려 몸에 핏기가 없는 구제불능의 시대였다. 그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우리를 바로 서게 했던것이 근면, 자조, 협동을 기치에 걸고 일어서게 했던 새마을 운동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의 발의 초기에 지식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새마을 운동은 주로 내무부의 계통적 관료에 의한 효율적인 동원편제에 힘을 실어 농촌인이 자각을 일깨울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므로 반발이 따랐다. 하지만 행정적 개발행위에 힘을 실어 인내로 지속적 추진하므로 지역주민의 협조를 끌어내어 상호협동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국가원수의 정치적 의지의 실천과 이를 효율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던 당시 중앙집권적 정치풍토, 그리고 내부 공무원들의 총동원에 의하여 실현되었다는 것이 성공의 업적이라 생각된다. 지금의 정치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답을 한다면 어림없는 발상이었을 것이다. 다행한 일이다. 적기에 강하게 추진하여 부자 된 나라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한때는 우리군도 청도 새마을과 자매결연 하여 문물을 교환한 적도 있다. 그때를 회상하며 청도를 돌아보니 전국에서 유명한 청도 소싸움이 있고 우리나라의 유일한 씨없는 감 “반시”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한다. 청도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저작권자 부안서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