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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반상의 역사

이석기 기자 입력 2016.04.07 16:46 수정 2016.04.07 04:38

조덕연칼럼-반상의 역사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디지털 부안일보 
“가보세 가보(甲午)세 을미적 을미(乙未)적 병신(丙申) 되면 못 간다네” 갑오개혁(1894년)과 동학농민운동 때 민초들이 부르던 희망의 노래였다. 오직 했으면 무능한 정부를 2년 내에 뒤집어야만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순수한 농민들로부터 나왔을까? 지금부터 120년 전 우리나라 실정은, 지방정부는 탐관오리들의 횡행으로 관료기강은 문란했고 봉건적 신분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상민이나 천인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음에도 중앙정부의 무능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역사 시대였다. 개혁파들은 김홍집을 필두로 일찍이 명치유신을 한 일본을 등에 업고 국군기무처를 신설하여 내정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개혁파들이나 지방정부의 농민 운동은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외부세력과(청‧일) 중앙정부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 결과로 얻은 것 또한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반상의 폐지다. 천년이 넘게 이어 온 천인(상놈,노비)의 제도가 철폐된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제도는 고려 초기부터 시작 된다. 국왕이 조회를 할 때 남향을 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에서는 반열을 동반(문반) 서쪽에서는 반열을 서반(무반)이라 하였는데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칭하였다. 지배지분을 처음에는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이르러 서는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로 바뀌게 된다. 전 현직에 근무하는 문관이나 무관의 가족이나 친척은 모두 양반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관직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집안은 모두가 양반이다. 그래서 지금도 족보를 자랑할 때 우리 몇 대 조는 무슨 벼슬을 했다고 자랑하게된 동기가 양반에 대한 신분을 보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반과 상놈의 차이는 혼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양반은 양반끼리 혼인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문을 내세워야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가문을 내세우자니 자동 거짓진술이 필요했고 그를 짜 맞추기 위해서는 글을 아는 사대부의 힘을 빌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사대부란 무엇인가? 글을 아는 사람을 사(士)라하고, 벼슬을 하는 사람을 대부(大夫)라 했고, 덕을 갖춘 사람을 군자(君子)라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대부는 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다. 일을 하면 양반으로서 품위를 손상했다. 일을하는 양반은 탓을 듣는 사회였으니 우리조상들은 천년이상을 허송세월했다는 결론 외에는 별다른 해석의 방법이 없다. 정말로 한심한 양반들의 사고가 우리민족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고 해도 지난 친 말은 아닐 듯싶다. 시간이 지나 독립협회의 노비해방 결의로 반상의 역사는 종결된다. 1897년 11월1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는 노비해방문제를 윤치호와 서재필의 공론으로 상정시켰고 총8회에 걸쳐 토론한 결과 참석자 500명이 만장일치로 의결함으로써 이 땅에 양반과 상놈의 사회는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반상의 역사는 조상이 줄을 잘 못 서는 바람에 자손대대 고통 속에 신음해야만했던 그 후손들, 그러나 근현대사에 융성한 나라를 세우는데는 그들이 근간이 되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유하고 있는 우리가 지금 느껴야하는 것은 양반의 가계를 자랑하기 보다는 근면 성실했던 조상의 얼을 기려야 할 때라 생각해본다. 세계의 반상의 역사를 보면 지금부터 3250년전 모세의 인도 하에 히브리인들 60만명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노예에서 해방되었고 미국이 개발을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대려다가 노예로 부려먹던 것을 1863년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했으며 이 지구상의 노예는 1980년 7월5일 마지막 노예였던 북아프리카 모리타니가 노예제를 해체하면서 이 지구상에 노예제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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