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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 칼럼-종교, 이름만 다를 뿐 하나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5.08.17 17:41 수정 2015.08.17 05:37

조덕연 칼럼-종교, 이름만 다를 뿐 하나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디지털 부안일보 
청주 시온성교회 고갑순 목사의 딸 결혼식이 때아닌 종교의 화합의 장이되었다. 청주 시온성교회 고 목사는 딸을 결혼시키면서 신랑(사위)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충북 종교인 사랑방의 방장인 곽동철 신부에게 주례를 요구했고 백령스님에게는 찬송 복음성가를 부탁했는데 이를 흔쾌히 응하여 이루어진 결혼식이었다. 이날 일반 예식장에서 거행된 예식에 곽동철 신부는 주례사를 통해 신랑 신부는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것을 항시 잊지말고 많이웃고 평생 사랑과 칭찬을 아끼지말고 살아가길 당부했고 노래로 포교하는 백령스님은 자신이 작사 작곡한 ‘사랑합니다’와 복음성가 ‘주께 두손모아 기도하니’를 축가로 불러 결혼식장 분위기를 한껏올려 식장에 참석한 종교인들이 서로 감동하며 칭찬하는 훈훈한 모습으로 모아졌다. 그렇다. 종교, 그 이름만 다를 뿐이지 추구하는 방향은 하나다. 종교는 나눔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공동체다. 그리스도의 사랑, 붓다의 자비, 공자의 인(仁 )은 말만 달리했을 뿐 의미 하는바는 결국 하나이지 않은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모두 공감하고 세상을 밝게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밝고 좋은 길을 두고 서로 편가르며 싸움질하는것은 분명 모자란 삶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가는 나그네처럼 다정하게 동행했으면 하고 소망해본다. 2013년말 세계종교 통계에 따르면 지구상의 인구 71억명중 무신론(무종교)자는 11.58%에 해당하는 8억3천만명으로 집계됐다. 88%에 해당하는 60억명 이상은 사랑을 소망하는 종교인으로 도처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 추구하는 사회, 사랑이 샘물처럼 넘치는 사회는 요원하다. 항상 시기하고 다투고 서로 잘났다고 우기다보니 그 모습은 꼴불견일수밖에 도리가없다. 2012년 8월17일 울산 야음성당에 한 목회자가(당시나이 43세) 들어가 석고 성모상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소변을 갈겼다. 그도 모자라서 8월 23일에는 또다시 성모상을 내려놓고 대변을 보았다. 8월 20일에는 대구 동화사 산신각에 침입해 불경을 찢고 정안수 사발에다 오줌을 가득 채웠다. 그는 분명 정신병자임에 틀림없지만 평소부터 성상과 불상을 우상숭배로 여긴 잠재적 발동에서 망측한 짓을 했다고본다. 영화 ‘그사람 그사랑 그세상’은 고인이 된 손양원 목사(1902-1950)의 순교적인 삶을 그린 영화다. 1948년 여순 반란사건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고,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환자와 함께 살다가 6,25동란때 공산당에 체포되어 48세를 일기로 목숨을 잃은 그가 남긴말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통당하고,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를 흘리는 사람이되라”이다. 한 시대를 참된 인간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으로 살아간 그의 생애가 감동적이다. 그러면 똑같은 종교적 사상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데 왜? 그런 사회가 조성되지 않는걸까? 대우스님은 믿음의 결여로 표현했다. 우리 인간의 불행은 식량의 부족이나 석유의 결핍이 아니라 인간들의 가슴속에 믿음이 추방되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다같은 사람이면서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 서로가 속이고 헐뜯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신의 원인이 되고 있음은 종교인이 종교적 믿음의 결여에서 온다는 사실을 각자 깨닫고 덕과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 공동체가 이땅에 깊이 살아 숨쉴수 있을것이다. 종교는 좋고 나쁨이 아니라 다같이 나누고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라는걸 인식한다면 다툴일이 아니라 함께가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가 우리사회를 훈훈하게 적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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