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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송성섭칼럼-그 또한 지나가리라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5.07.23 23:55 수정 2015.07.23 11:51

송성섭칼럼-그 또한 지나가리라
 
ⓒ 디지털 부안일보 
여름 장마에 뒤뜰 축대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큰 장마는 아직 오지 않고 아내가 심어놓은 봉숭아, 백일홍, 해바라기가 곱게 피었습니다. 태풍 ‘찬홈’이 한차례 지나갔지만 축대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고 멀쩡합니다. 장마다운 장마가 오지 않으니 가뭄에 시달리는 농심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면 장마전선이 전국의 하늘에 드리워 애타는 농부의 마음과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었으면 합니다. 한 여름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뒷산에는 대낮인대도 부엉이가 울고 풀밭 여치 소리도 시원 합니다. 법정스님이야 종교에 귀의하여 수도하는 불제자로 그 분의 무소유 철학을 따라갈 수 없지만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욕심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구겨지고 삐틀어진 세상에서 방관자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한발 물러서서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이 칠십이 넘으니 이제는 여시가 되는 모양이지요. 하기야 여시도 백년을 살면 둔갑을 한다는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둔갑은 못할망정 칠십여년 쯤 살았으면 남의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권력과 금력이 하늘을 찌르는 세상입니다. 지금처럼 권력과 금력의 무게가 무소불위로 가난한 자들의 가녀린 어깨를 처참하게 짓누를 때가 또 있었던가요. 정치꾼들의 위선과 허세와 거짓, 기업인들의 기만과 탐닉, 그들의 유리알 같은 뻔한 속셈이 혐오의 도를 넘어 구역질이 납니다. 권력과 금력에 상관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탁류로 범벅이 된 세상 각박하고 참담한 세상이 국운이나 개인의 운명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혹 합니다. 옛 선비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인간의 청빈한 가치로 여겼지만 지금 세상이면 굶어 죽기 십상이요, 인생의 낙오자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기에 알맞았겠지만 그들은 그 가난 속에서 행복과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느끼며 살았을 겁니다. 법정스님의 글 중에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에 청빈이나 청렴을 말하는 것은 미친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며, 청빈이나 청렴은 사전에서나 나오는 낱말이며 사어가 된지 오래입니다. 청빈한 정치인 청렴한 고위 공직자를 찾기에는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요, 하늘에서 별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며, 가진자는 더 가지려 혈안이요, 힘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발밑에서 굴종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한여름 뙤약볕 보다 더한 열기가 치받쳐 나의 평안을 망치기 일쑤이니 접어 두기로 합시다. 세상사 슬픔이 깊으면 한이 되고 한이 깊으면 분노가 되며 분노 뒤에는 정망과 체념과 혐오가 옵니다. 자신을 진정하고 인생은 유한한 것이니 쓰거웠던 삶도 집착과 원망도 자책과 회한도 그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영욕의 삶도 인생의 출구에 서면 한 조각 꿈길인것도 알게 됩니다. 우리네 가락 ‘홍타령’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속이요 이것저것도 꿈이로다. 꿈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련만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꿈같은 인생이다고 어찌 우리의 삶을 꿈길로만 생각 하리요, 다시 못오는 인생이기에 값있고 보람있게 사는 것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는 삶은 자신의 책임이며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의 저녁이 찾아올 때 회한의 눈물만 흘려서야 되겠습니까. 서녘에 물든 노을이 곱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누구에겐가 감사 하고픈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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