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천당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4.07.11 20:31 수정 2014.07.11 08:30

조덕연칼럼-천당
 
ⓒ 디지털 부안일보 
어느 종교단체의 소모임에서의 일이다. 당일모임 내용은 성서를 바로 이해하자는 모임이었는데 일원중 한사람이 “천당은 반드시 있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다보니 이야기가 소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평소 “천당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금의 삶이 천당이지 내세의 천당은 있을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활화산이 되어 토론은 끝이없이 이어진다. 결과는 ‘소신대로 살자’는 결론을 내렸지만 왠지 꺼림칙한 여운을 남긴다. 내가 천당을 처음들은것은 유년시절 어느 교회에서 불러봤던 찬송가의 한 구절이다.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것도 한두번밖에 나가지않은 그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노래의 구절은 이랬다. “천당가는 길 편히 가리니 주의품에 안기세”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후 중학교 때 접한 영화 “지옥문”이다. 불교영화로 기억되는데 나쁜 삶을 살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으로 생각된다. 천당과 지옥은 종교에서 많이 강조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바르게 살면 극락왕생이요, 못된 짓하고 살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논리다. 기독교는 더 강하다. 여행길에 나서면 역 앞에서 노란 띠를 두르고 외치는 무리들을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다. 그들은 진정어린 믿음으로 외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독신앙을 가진 사람도 고운 시선으로 비추어 지는지는 의문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래는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나라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활동으로 이루어 졌지만 200여년전 우리의 조상은 책을읽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소공동체를 형성하여 이 땅에 교회를 세운 민족이다.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발을 붙일때 벽에 부딛친것은 유학자들의 반발이었다. 유생들이 기독교인들을 거부한 첫 번째 이유는 천당만을 믿고 생활하는 그들의 태도에 대한 비난이었고 천당을 미끼로 조상의 제사모시기를 거부하는 행위로 이땅에 많은 순교자를 남겼다. 그렇다면 천당과 지옥은 과연 있는 것일까? 그것은 가본사람도 없고 더욱이 다녀온 사람이 없기에 알수없는 일이다. 영국의 천재물리학자 스티븐호킹(1942-)박사는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가하면 프랑스의 천재수학자가있다. 1623년에 태어나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제로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갈파한 파스칼 이다.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인 그는 세상사람을 두종류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의인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죄가없다고 생각하는 죄인이라고 구분한다. 천당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란다. 왜냐하면 신의존재는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서 결론내리기를 일단 믿고 보는것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신을 믿고 바르게 살다가 천당이 있다면 가는것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믿음없이 제멋대로 즐기며 타락의 삶을 살다가 만일에 천당이 있으면 지옥행일 테니 있다고 믿고 행하면 손해가 없다는 논리다. 우리는 하루에도 천당과 지옥을 몇 번씩 오고 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일이 풀리지 않고 절박한 나락으로 밀리는 날은 지옥이요, 일이 잘풀려 행복한 웃음을 머금는 날은 천당이다. 굳이 내세의 천당을 꿈꾸기보다는 지금의 삶을 천당으로 만들어봄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람이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되면 남에게 맺힌 한이 없는사람이 없을진데, 그 한을 품고가는 인생이 어찌 천당을 기대할것인가? 오늘의 삶이 절박하고 풀리지않아 내세라도 편안한 삶을 기대하는 희망은 좋지만 내세의 어려운 천당을 그리기 보다는 오늘의 삶이 천당이 되도록 하는 삶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부안서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