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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징비록이 주는 교훈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2.06.13 17:39 수정 2012.06.13 05:39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디지털 부안일보 
징비록(국보132호)은 조선중기 선조때의 명상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저술한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이다. 징비록이란 책이름은 내 지난일을 징계하여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子其懲而毖後患)라는 시경의 문구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임진란 중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날에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없도록 미리 조심 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만을 침략한 양국 사이의 전쟁으로 보지않고 중국까지 침략 하려는 동아 전국으로 파악하여 일본의 대륙 진공적 침략을 조선과 중국이 합세하여 적군을 격퇴시킨 방위 전쟁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이 끝이나고 300여년이 지난 후 우리나라를 반세기 가까이 식민지화 하고 대동아 공영권 이라는 속임수로 아시아를 지배 하고자 했던 야욕 또한 같은 맥락에서 판단함이 옳을듯 싶다. 결국은 태평양 전쟁으로 종지부를 찍게되니 망할 수 밖에없는 나라는 일본이라 본다. 저자는 왜적을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다 평가한다. 그들이 전쟁하는 것은 거의 한 가지도 남을 속이려는 꾀에서 나오지 않은것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이 100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왜병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엎어지고 넘어져서 원근 지방이 바람에 쓰러지듯이 모두 넋을 잃었던 것이다. 왜병은 멈출 수 없는 기세를 타고 열흘 만에 바로 서울에 이르렀다. 지혜있는 사람이 미쳐 꾀를 내지못하고 용맹 있는 사람이 미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인심이 무너져 수습할수 없게되었다. 적군의 교묘한 계책에 속수무책 일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 이었다. 다행이 전선을 가다듬고 뜻있는 의병들이 있어 나라를 지켜낼수 있었음은 국운이 남아 있었음 이었으리라. 서애 유성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1542년 경상도 의성에서 태어나 전란중에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 되었으나 모함으로 이내 파면되고 다시 부원군으로 서용되어 안주에서 명나라 장수의 접대와 군량보급에 힘쓰다 이후 전란이 끝날때 까지 영의정으로 서삼남도, 사도도 체찰사를 겸무 하면서 국군의 정무를 한몸에 지고 외교, 군무, 민정등에 종횡 무진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지켰다. 조선후기 실학의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임진 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것은 충무공 한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며 충무공 한사람은 무장에 불과 했으나 유선생이 그를 등용 시키는 지혜가 있었기에 나라의 위기를 극복 할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징비록의 끝부분에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순신은 젊었을때 부터 영특하고 활달하여 어떤 사물에도 구속을 받지 않았다. 무과의 벼슬길에 나갔으나 권세가에 붙어서 승진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정도에 어긋나면 직속상관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말과 웃움이 적고 담기가 있어 자기몸을 잊고 국난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의 수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간이 있어도 명운이 없어서 가졌던 재간 백가지중에 한 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적는다. 난세일수록 나라 걱정하는 소리는 요란해진다. 소신이 아니라 끼리끼리의 득을 형성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국민을 기만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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