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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이석기 칼럼

'생거부안' 뒤의 충격 "유전인가 보다"

이석기 기자 입력 2026.08.31 11:46 수정 2026.09.02 09:52

이석기/서림신문 대표
이석기/서림신문 대표
얼마 전 지인과 함께 부안의 한 식당을 찾았다.
식사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뒷자리로 40대쯤으로 보이는 젊은이 여덟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차림새나 말투로 보아 부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아마도 부안 어디에선가 직장을 다니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남의 이야기를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저절로 귀가 쫑긋해졌다.
그들 가운데 선임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부안 이야기를 꺼냈다.
“부안은 참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러면서 부안의 역사와 지리, 먹거리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놓기 시작했다.
예부터 부안은 바다와 산, 넓은 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했고, 먹고살 것이 넉넉한 고장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어 어사 박문수가 임금에게 부안을 두고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고 장계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부안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함께 온 사람들에게 부안의 역사와 문화, 지명과 특산물까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마치 부안 사람이 부안 사람들에게 부안을 소개하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그들의 이야기에 점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이야기에 그만 수저를 내려놓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어사 박문수가 부안을 ‘생거부안’이라고만 쓴 건 아니래요.”
순간 귀가 더 커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박문수는 부안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많이 사는 고장’이라는 내용까지 장계에 적었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 사람들은 ‘생거부안’이라는 말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부족한 사람이 많이 산다’는 내용은 애써 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사실관계가 확인된 이야기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실제 박문수가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렸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묘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족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
남이 돈을 벌면 배가 아픈 사람.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는 사람.
남의 장점보다 단점부터 찾아내는 사람.
내가 최고인 줄 알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남의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모습에서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사람 이니던가.
어사 박문수의 눈으로 본다면,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부족한 사람들’이었겠는가.
그런데 정말 나를 충격에 빠뜨린 말은 그 다음에 나왔다.
한 젊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부안에 짧은 기간 있어보니… 그런 것도 유전인가 봐?”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 말이 농담인지, 그들만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큼 오래 가슴에 남았다.
‘그런 것도 유전인가 봐?’
그들이 말한 ‘그런 것’이 무엇인지 굳이 되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화가 나기보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생거부안’은 과연 무엇인가.
산이 좋고 바다가 좋고 들이 기름져서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것만으로 생거부안일까.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은 자연환경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남의 성공을 축하해주고, 조금 부족해도 기다려주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그런 곳이 진짜 살기 좋은 고장이 아닐까.
부안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많고,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사람도 많다. 말없이 봉사하는 사람도 있고,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부안은 여전히 따뜻한 곳이다.
그렇기에 더욱 아쉽다.
몇몇 사람의 이기심과 편 가르기, 시기와 질투가 마치 부안 사람 전체의 모습인 것처럼 비춰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식당 뒷자리에서 들었던 젊은이의 한마디는 우리 모두에게 던진 질문인지도 모른다.
‘부안 사람들은 서로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가.’
‘나는 남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 역시 누군가의 눈에는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고 있으리라는것.
생거부안.
우리가 오래도록 자랑해 온 이름이다.
이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자연만 살기 좋은 고장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살기 좋은 부안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식당에서 들었던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부안에 짧은 기간 있어보니… 그런 것도 유전인가 봐?”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아픈 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이야말로 우리가 한 번쯤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할 '부안'의 ‘오답노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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