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두를 즐겨 신지 않는다. 작은 키가 핸디캡인 나에게 키높이 구두를 권하는 주변 사람들도 많았지만,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출근길 구두를 신을 때마다 한 때 구두 수선공이었던 아버지(故 김종식)에 대한 고마움보다 더 큰 그리움이 이제 어느덧 예순을 갓 넘긴 가장의 두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형과 장녀인 누나와 2년 터울로 부안군 주산면에서 1964년에 태어난 나는 부모님의 고심 끝에 출생신고를 1년이나 뒤로 미뤄서 1965년생으로 되어있다. 이유는 형과 누나, 그리고 나까지 셋이 한꺼번에 중고등학교를 다닌다면 학비 부담이 상당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부모님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60~70년대 주산면 돈계리 소농의 곤궁한 가정형편으로는 도저히 자녀들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서울로 상경한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으로 5남매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가끔 어머니를 따라 간 서울 염창동에 있는 아버지의 가게에는 낡은 구두를 꿰매고 굽을 갈아내시느라 늘 기계 소음과 가죽냄새로 가득했다. 내 아버지의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한은 고스란히 자식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되어 검은 구두약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자식의 미래를 반짝이게 닦아 주셨다.
기성화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구두 수선방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또다시 고향 주산으로 낙향하여 소농의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기억속의 내 아버지는 신의가 있고 강직한 성품이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짓은 자신이든 남이든 용납하지 않는 분 이었다.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시면서 힘들게 번 돈을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신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2019년에 영면에 드셨다. 말수가 적었지만 묵묵한 손길로 구두를 수선하고 논밭을 일구면서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전하던 아버지! 이제는 그 손길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지만, 아버지의 삶의 궤적들은 제 마음속에 깊게 구두약의 강한 냄새만큼이나 깊이 남아 내가 걸어갈 길을 비춰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