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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영 택
부안고 13회 동창회장 / 부안석재 대표 |
ⓒ 디지털 부안일보 |
‘석샘’은 강원도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고, ‘똥깡’은 광주에서 버스 기사를 하고 있으며, ‘장박사’는 고위직 공무원이다. ‘엿마니’는 시골인 고향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영감’은 조그만 돌팍공장에서 27년째 정질을 하고있다.
이렇듯 전국 각지에서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대한민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동창생 녀석들이 고등학교 졸업 30주년이 되어 한자리에 다시 모였다.
학창시절, 봄가을 소풍 때면 석동산 자락에서 카세트 라디오 반주에 맞추어 고고춤을 추었었지, 가야호를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선생님 몰래 방문을 잠그고 술잔에 우정을 부어 마셨지, 담배를 피우다 별명이 ‘킹콩’이었던 교감 선생님에게 들켜 다리에 쥐가 나도록 운동장을 뛰었었지,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 자전거로 들이 받아 썸씽을 만들었다는 등 이야기꽃이 만발하며 그 시절 까까머리 친구가 되어 아름다운 추억에 푹 빠졌다.
형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술자리가 이어지며 가족, 사업, 정치 등 이야기의 주제가 다양해진다.
세상사는 이야기가 대세를 이루며 누구는 사업에 성공하여 좋은 일도 많이 한다며 칭찬하고, 누구는 하는 일마다 실패한다며 안타까워하고, 어떤 녀석은 친구 등쳐먹고 사라졌다고 비토하기도 하며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가 오고 간다.
사업에 성공하여 소위 잘나간다는 친구들은 기백만원의 협찬금도 내주지만 형편이 어려워 참석하기조차도 버거운 친구들도 있는게 현실이다.
지난 30년을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생존전략을 세우고 사력을 다하여 앞만 보고 달리다가 한번 쯤 뒤돌아보며 앞으로의 30년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것인가. 이쯤 해서는 표정들이 사뭇 진지해진다.
연고가 없어 수십년 만에 처음 고향을 찾은 친구도 있고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있어 자주 찾아오는 친구도 있다.
나는 고향을 떠나보지 못해서 도시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어떤지를 잘 알지 못한다.
삶에 허덕이다 지치면 어머니 품같은 그리움도 있을테고 한편으로는 기억하기도 싫은 어두운 기억도 존재할 것이다.
은퇴하면 고향에 내려와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겠다는 괘씸한 녀석도 있다.
평소에 모교나 고향의 발전을 위해 후원이나 관심은 고사하고 농산물 한 가지도 사가지 않는 녀석인데 삶이 버겁거나 의지할 곳 마땅치 않으면 찾는 곳이 고향이란다.
물론 풍부한 살림살이나 넉넉한 인심이 있어 누구든지 품에 안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향이랍시고 부모님 돌아가셔 선산에 안장하려해도, 조그만 양계장 하나 지어 닭이라도 키워보려 해도 혈맥이 끊긴다거나 환경이 오염된다는 등의 온갖 구실을 붙여 거절당하기 일쑤다.
가끔 한번씩 이라도 수박 한 덩이 사들고 찾아와 동네 경로당 어른들께 인사드리면 자기 부모님 어깨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알기는 할까?
술한잔 덜 마시고 월 1만원 하는 동문회 장학금 한 구좌 보내 후배들 키워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가.
그런 녀석들 철에 따라 쭈꾸미며 전어, 젓갈, 김치 등을 바리바리 싸주면 서로 오고 가는 정이 새록새록 솟을 것이다.
농어촌 생활이 한가롭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데 농사는 아무나 짓고 고기는 아무나 잡나. 소 밥 먹이는 것도 노하우가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면 쌍수 들고 환영이다.
적응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각박한 도시생활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일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뛰고 부지런히 모아서 고향에 투자하기를 바란다.
도시의 수십평 아파트 한 채 처분하면 시골의 수천평의 땅은 족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없는 녀석이면 어쩌랴.
소 밥 주는 방법은 학선이가 알려주고 형편이 어려워 굶고 있으면 옥남이가 밥은 먹여줄거다. 혹시라도 일찍 죽으면 영택이가 비석도 세워줄거다.
공기 맑고 전망 좋은 곳에 연립주택 한동 지어서 텃밭이나 가꾸고 봉사활동 이나 하며 오손도손 모여 살자는 꿈을 꼭 이루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