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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송성섭칼럼-지나간 날은 아름답습니다.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09.09.23 20:02 수정 2009.09.23 08:02

 
↑↑ 송 성 섭 서림신문 주필
ⓒ 디지털 부안일보 
뜰에 핀 봉숭아꽃이 소슬한 바람에 한잎 두잎 저가고 있습니다. 머언 옛날 어느 소녀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이 그렇게도 예쁘던 아련한 그리움이 샘물처럼 가슴에 차오릅니다. 아직도 그리움은 남아 있는 가, 메마른 가슴에도 아직 그리움은 남아 있는 것인가. 소리 없는 반란이 가슴속 한줄기 열기로 가쁜 맥박으로 뛰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고 세월이 아프게 가고 있습니다. 밤새워 풀벌레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달빛과 별빛을 안고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한기가 온몸에 스며도 바닷가를 서성입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게 저려옵니다. 이 나이가 되면 헤어진 모든 것들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건조한 날들이 못 견디게 짓누르는 일상이 권태로워 몇 권의 책을 싸들고 고향 섬마을 나의 누옥을 찾은 지가 두 달여가 되었습니다. 장마철의 누기와 곰팡이가 찬 방에서 문밖에 나가는 일 없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왔습니다. 고향이라 하지만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 터놓을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심은 각박해지고 이웃 간에 정도 변했습니다. 그저 잡다한 세상사를 잊고 마음의 피곤을 덜기 위해 고향집을 찾은 것입니다. 옛날 왕조 시대에 절해고도로 귀양을 보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세상사 모두가 무관해지고 게으르고 무심한 세월만 죽이고 있습니다. 섬에 있다 보면 조금씩 외로워지고 조금씩 세월이 슬퍼집니다. 조금은 황폐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섬을 나는 조금씩 닮아가고 있습니다. 가을 달빛이 좋고 별들이 영롱하고 찰싹이는 파도가 밀리는 물결이 아름답습니다. 세상사 시름을 모두 잊고 가난한 마음을 달래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청승맞음도 때로는 낭만이 있습니다. 가슴 한켠에 개어 두었던 추억의 한 자락을 펼치며 그 시절 소년의 꿈과 청년의 고뇌와 중년의 아쉬움이 노년의 회한으로 이어 집니다. 잃어버린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찾아 떠나기에는 너무 기진하고 너무 멀리 떠나 왔습니다. 상심하고 자책해도 다시는 꾸지 못할 꿈입니다. 자난 날은 아름답고 그리운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기에 그날들이 더욱 애틋합니다. 사람의 만남을 인연이라 한다지요. 우리는 많은 인연 속에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헤어져 못 잊어 그리운 사람. 지금도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를 가슴에 묻고 삽니다. 그 불씨는 나의 영혼을 다사롭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누구나 사연은 있게 마련이지만 지나고 나면 꿈결 같은 인생 이었습니다. 사람의 욕심 중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물욕이라 합니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이 인생입니다.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것이 자랑은 못되지만 그저 배부른 한 끼니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을의 정취는 많은 상념에 젖게 합니다. 엊그제만 같았던 청춘은 황혼녘 한조각 구름처럼 바람에 스치우고 말았습니다. 이룬 것도 이룰 것도 없는 한 세상이 훌쩍 가버렸습니다. 멀리 떠나온 생의 여정에서 뒤돌아보고 뒤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은 쉼 없이 흐르는데 가슴은 답답하고 마음은 둘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귀찮은 노인이 되기보다는 원숙한 노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 계절에도 달과 별과 스러져 가는 모든 것들과 함께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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