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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송성섭칼럼-관자를 보면서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09.06.26 10:58 수정 2009.06.26 11:04

 
↑↑ 송 성 섭 서림신문 주필
ⓒ 디지털 부안일보 
관자는 지금부터 2700여년전 춘추 전국 시대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관포지교’의 관중이라는 인물로 잘 알려지고 있다. 그는 불우했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제나라의 재상까지 올라 제의 환공을 춘추 오패로 끌어 올린 사람으로 그의 정치 철학과 탁월한 국가 경영을 보면서 몇 천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매료되고 찬탄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 정치 상황이 암울하고 바람 잘날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이 이 시대에 회자됨은 무엇 때문인가. 관중은 정치 외교 경제에 철저하게 실리를 앞세우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실용주의와 맞물려 관중의 사상 체계는 현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박은 실용주의의 지침서가 될만하다. 이조 오백년사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인과 의를 바탕으로 충과 효를 강요하고 철저 하게 개인 의사를 부정하는 폐쇄된 종적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계급의식을 유발하여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 하였다. 공, 맹의 학문은 정치와는 동떨어진 유토피아적 꿈에 불과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실사구시의 실학 학문이 조선중엽에 선비 사회에서 연구되고 실행하려는 실학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실학은 정치에 접목 시키지 못한 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명치유신이라고 말하는 흠정헌법은 1889년에 메이지 일왕이 반포 일본을 근대화 하고 강력한 군사적 제국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80여년이 지난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영구 집권 철권 정치로 군사 독재 정권을 획책하였다. 너무도 상반된 역사의 흐름속에 우리는 언제까지 불행의 늪에서 허덕여야 하는가. 오늘 이 땅에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집단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권력자들은 부정과 비리의 탁랑에 빠지고 정권은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종 잡을수 없는 판국에서 우리는 안개속을 표류하고 있다. 민주 공화국이라 하여 국민이 주인된 적 없고 주인 의식도 없는 난파 직전의 배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정치를 말하기조차 구역질이 나고 세상이 굴욕스러워 사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6월은 보훈의 달이다. 우리는 근세까지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든 변방의 서러운 민족이었다. 섬나라 왜구의 노략질에 제대로 손도 못쓰다가 결국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일제의 압제와 수탈속에 민족혼까지 말살 하려는 고통의 36년을 보낸 것이 아니었던가! 정처없이 떠돌던 유랑의 길목에서 주검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 쳤던 순국선열들, 피지 못한 꽃봉오리로 쓰러져 갔던 6.25 동족상잔의 비극속에 산화해간 젊은 영혼들, 그들이 흘린 피와 주검을 헛되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엇이 국가를 위하는 것인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죽음을 미화해서도 안 되지만 폄하해서도 안된다. 대중과 군중은 살인 무기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 누가 반론을 재기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소박한 꿈도 작은 행복도 앗아가 버리는 현실에서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삶을 갈구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치자의 도리, 그것은 국가 경영을 잘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질곡된 역사에서 한번도 행복 하지 못한 이 땅의 백성들을 행복 하게할 의무가 있다. 궁색한 우리들의 고달픈 삶에 한조각 행복을 던져 준다면 개처럼 받아먹으리라. 고되고 허기진 하루를 걷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고 배려하는 정치가 사회가 이 땅에 바로 서기를 기원해보지만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바람은 어데서 불고 있는가. 폭풍은 어데서 잠들고 있는가. 나는 혼탁한 세상을 향해 밤마다 무딘 칼을 시퍼렇게 갈고, 포청천의 작두가 있다면 그 개작두가 있다면 열번이라도 백번이라도 살인을 하고 싶다. 오늘밤 하늘은 별도 없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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