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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부자이야기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09.04.17 11:15 수정 2009.04.17 11:18

 
↑↑ 조 덕 연 부안서림신문 객원논설위원
ⓒ 디지털 부안일보 
권불10년, 부불3대라 했다. 부와권력은 오래토록 유지해나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부자이야기하면 10대에 걸쳐 300년동안 부를 누려온 경주 최부잣집의 이야기와 상도로 유명해진 거상 임상옥의 이야기를 빼놓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경제학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문을 전공한 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로웠기에 부의 표본으로 우리의 뇌리에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경주 최부잣 집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매체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지만 그중에도 제일먼저 기억에 떠오르는것이 있다면 그는 단연코 그 집안의 가훈(六訓)을 들수있다. 1,과거는 보돼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마라. 2,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3,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마라. 4,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간은 무명옷을 입어라. 6,사방 100리(80㎞)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경주 최부잣 집의 가문을 처음 일으킨 사람은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9대조인 최국선으로부터 시작된다. 1671년 현종 신해년에 삼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을때 일이다. 최국선은 집바깥 마당에 큰 솥을걸고 그 집의 800석이든 곡간을 헐었다. 모든 사람이 굶어죽는 형편인데 나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겠느냐며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입혀주어 수천 수만명의 인명을 이어주는 구휼에 재물을 나누어 준것이다. 최부잣 집의 한해 소비되는 쌀중 1/3은 자신들이 사용했고, 1/3은 과객을 접대하는데 소비했고, 나머지 1/3은 빈민구휼에 사용했다하니 그 의로움이 부를 오래토록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듯하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었다. 상해임시정부에 평생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1947년에 대구에서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남은재산과 사는 집까지 처분하여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학교가 합하여 오늘의 영남대학교로 이어졌으니 최부잣집 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부자였음이 틀림없다.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나 견딜수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된다” 온 고을이 박연차가 풍기는 구린내로 천지를 진동하고 있는 지금, 널리 알려진 최부잣집의 금언(金言)을 되뇌어본다. “큰 것을 채우려면 먼저 비워라” 거상 임상옥이 남긴 말이다. 거상 임상옥은 최인호가 쓴 소설 “상도”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알려진 조선조 후기의부자다. 177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가포 임상옥은 1796년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그 사업이 번창하였을 때에는 사무실에서 회계를 맡아보는 직원수가 70명을 넘었고 그의 재산을 은덩이로 쌓아두면 마이산만 하다고 비유할 정도였다. 그 당시 조선왕조가 비축하고 있는 국고중 은자가 42만냥인데 임상옥이 잡고흔든 인삼교역액은 100만냥 이었으니 국고보다 임상옥이 보유한 은자가 더 많았다는 평가이고 보면 그의 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하겠다. 부자는 하늘에서 낸다했다. 임상옥의 부는 시대적 산물이었다. 단지 인삼하나로 부를이룬 그는 시대적 상황이 양삼법(인삼을 재배하는 방법)이 널리 보급되어 많은 인삼을 확보할수있는 시점이었고, 박종경이라는 세도가가 있었기에 인삼교역권을 독점할수 있었으며, 거기다 더하여 임상옥이 가진 상도의 기질이 있었기에 짧은 기간에 많은부를 축적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부자였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벌어들인 돈이 난세에 어떻게 써졌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이 살고있는 의주에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돌았을때에 곡간의 문을열어 곡식과 돈을 풀었고 죽기전에는 채무자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금덩이와 은덩이를 모두 나누어주어 그간 모았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적극적 이었다는게 귀감이된다. 임상옥 그는 150년전에 이땅에서 살다간 사람이다. 그의 삶은 분명코 한 시대를 잘살고 간 사람이다. 난세에 자신혼자만 살려 하지않고 나눌 줄 알았던 그의 생애가 우리는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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