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리 반암 마을(이장 김형철, 부녀회장 김귀순)은 약 190여년 전 전주 이씨가 원중마을에서 이주하면서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현재 김형철 이장과 김귀순 부녀회장을 주축으로 25세대 30여명의 주민이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지석묘가 3기가 있었는데 1기는 매몰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이 마을 인근에 위치한 석하 마을은 도읍이라 불리고 있어 반암마을은 선사시대 부족들의 공동무덤터가 아닌가 추측된다.
70여년전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땅을 깊이 팔 때 석곽분이 가끔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한 반암마을은 옛날부터 내변산을 왕래하던 중간지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목적지로 출발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이곳을 거쳐가던 선비 하나가 반암마을의 가옥을 쳐다보고는 “마을에 있는 가옥들이 북쪽을 향해 있지 않으면 이 마을에 과부가 많이 생겨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이 마을에는 마을세대수 3분의 2가량의 세대에 과부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반암마을이라는 유래가 생긴 것은 마을에 있는 고인돌의 형태가 둥글지 않고 ‘사람이 식사하는 소반과 같다’하여 소반 ‘반(盤)’자와 바위 ‘암(岩)’ 자를 합하여 반암리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표기를 하면서 지금의 반‘반’자와 바위 ‘암’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암마을에서 ‘재산을 모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 살라는 말이 있다.’ 한다.
반암마을에 계속 거주하면 소반에 차려진 음식같이 곧 없어질 것을 염려하는 뜻에서 괜한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영은천이라고 불리는 반암마을의 뒤편에 흐르고 있는 하천은 원래는 형태조차 있지 않았다.
너무나 가난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많은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팔아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자연히 산림이 황폐하여 큰 홍수가 나서 하천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 하천은 자연상태를 유지하다가 8․15 광복 후 480양곡이 지원되어 오늘의 하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 하천이 형성되기 전에는 현재의 하천 윗부분에 1000여평의 대나무밭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가난한 마음에 부는 겨울 찬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할을 했으나 개천이 형성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