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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석 기
서림신문 대표 |
ⓒ 디지털 부안일보 |
2010년 8월 20일, 서림신문이 22돌의 생일을 맞이했다.
서림신문의 창간 일을 기억하고 있는 각계각층 독자들의 앞선 축하전화가 빗발치고 축전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22돌의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않고, 우리고장 부안언론에 선구자로 큰 획을 긋고 떠나신 서림신문 발행인 고 윤종성 선생이 생각나서가 아니라, 22살의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 끼우며 넘어지려 할땐 곧바로 중심을 잡아주던 수많은 독자들과 필자의 선후배들이 하나의 영상물이 되어 눈앞을 스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명 되지않는 신문사 식구들과 식사한끼 함께하는 조촐한 생일잔치마저 준비할수 없는 아픈 마음도 아픈 마음이지만, 지금껏 돌보아준 독자들과 선후배들에게 이렇다 할 보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욱 마음이 아픈 하루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도 서림신문과 연을 맺고있는 선후배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이석기기를 알면 그것이 곧 고생의 시작이다”고…….
이에 맞장구치는 또 다른 선후배들의 말이있다.
“쥐뿔도 없는것이 일은 꼬박꼬박 터트린다. 제발 돈 되는 일좀 했으면 좋겠다”고…….
틀린말은 아니다. 뒤돌아보면 나를 알아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직계 가족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수많은 선후배들이 나로 인해 아니, 서림신문으로 인해 고생했고 앞으로도 고생할일만 보인다.
이 같은 선후배들의 고생이 오늘의 서림신문, 22살 청년의 서림신문으로 만들지 않았다 싶다.
그럼에도 그 선후배들은 도망치지 않고 서림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일이라면 또 고생을 자처하고 나선다.
“힘들고 고생은 되더라도 보람있는 일이다”는게 이들 선후배들의 한 목소리다.
고마울 뿐이다.
막노동에 가까운 각종 행사를 잘들도 처리해 낸다.
무보수 막노동에 아무리 힘이 들어도 성질나쁜 나의 이야기를 잘도 따라준다.
세계프로레슬링의 우상 박치기 왕 김일 선수와 후계자 이왕표, 노지심 등 30여명의 국내외 선수를 부안으로 끌어들여 세계프로레슬링 챔피언 타이틀매치를 두 번씩이나 치르는 고생에도 이들 선후배들은 말이 없었다.
벌써 6회째를 맞이하고 있는 매년 1월 1일 해돋이 행사인 썬키스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손발이 얼고 밤새 눈 치우는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이들 선후배들은 군말 한마디 없다.
어디 그뿐인가, 두 차례의 세계적인 테너 박인수초청공연과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아초청 공연, 32차례의 부안군민노래자랑 등 헤아릴 수 없는 22년 동안의 각종 행사에 이들 선후배들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제1회에 이어 대박을 만들어 낸 제2회 ‘님의 뽕’ 축제의 12일간의 중노동에도 도망치는 선후배는 없었다.
모두가 ‘공익적 행사’라는데 신바람이 나 있는 것이다.
비 오듯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행사를 준비해도 누구하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없어도 이들은 또 ‘공익적 행사’를 만들어 낸다.
22살의 청년으로 키워 온 서림신문 독자들과 나의 선후배들이 오늘따라 더욱 보고픈 하루다.
나는, 고생스런 일을 시작할 때마다 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당신들에게 진 빚,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한다. 다만 ‘나’보다 ‘우리’를 위해 살겠노라”고…….
서림신문 창간 22돌인 오늘도 다짐해본다.
서림신문을 22년 동안 키워준 독자여러분과 부안군민에게 보답하는 길, ‘나’보다도 ‘우리’를 위해 사는 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