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아버지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0.07.06 22:28 수정 2010.07.06 09:21

 
↑↑ 조 덕 연 서림신문 주필
ⓒ 디지털 부안일보 
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태어나셨다. 아버지나이 네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셨고 할머니는 내가 네 살 되는 해에 돌아가셨으니 할머니는 한세대를 홀로사시며 우리가문의 대를 이은 샘이다.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할아버지를 병환으로 잃으시고 홀로되신 할머니께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길쌈으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청상고절(靑孀孤節)하신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성품이 올곧으셨고 불의를 꾸짖는 분이셨으며 항상 지역의 리더 위치에 계셨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 1945년 결혼하여 아홉 남매를 낳으니 어려운 살림에 힘이 겨웠을 법도한데 생활은 비교적 낙천적이셨다. 약주를 좋아하셨고 흥에겨울때면 가끔은 노래도 곧잘 부르셨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셨다. 그 어떤 잘못도 이실직고 하면 용서가 되었지만 거짓말 한 죄는 중벌로 다스렸다.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어머니와 함께 의논해서 하라”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희망 이었나 보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고 외할머니 댁과 진 외가댁을 자주 다니신 걸보면 아버지는 나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듯하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의례히 진서의 외할머니 와 상서 가오리의 할머니를 찾아 새배를 드리고 아버지는 할머니께 심청전과 춘향전을 읽어주셨고 나에게는 바다구경을 시켜주었던 기억과, 정월 대보름날은 아침일찍 더위를 팔았던 기억, 할머니가 일러주신 잡곡밥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나를 고등학교에 보낼때 아버지는 소유하고 있는 논의절반을 팔아 학교에 보냈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는 한동네에 고등학생이 가끔 하나씩 있을 때이니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논을 팔아 학교를 보낸걸 보면 아버지의 나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열정에 비해 나는 언제나 함량미달 이었나보다. 어렸을 때부터 힘은있어 뭉치기를 하면 항상 친구들을 압도했지만 싸움을 하면 항상 얻어맞고 징징 짜며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으니 아버지는 늘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또한 발표력이 부족한 나였기에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대답을 못하고 울음먼저 터트렸으니 그때 아버지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히짐작이간다. 다 커서 사회생활 할때까지 아버지의 속은 항상 타들어 갔을 것이다. 내나이 40대중반에 면장 발령을 받아 줄포면에 부임하니 아버지께서는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시어 나를 격려 하시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가희망이셨다. 나는 지금 아버지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며온다. 흔히 말하기를 저도 커서 아버지가 되어야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한다지만 나는 아버지가 된 늦게 까지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천하에 없는 불효자다. 그렇게 애지중지 하고 항상 곁에서 아니면 먼발치 에서 자식 사랑만 하셨던 아버지에게 나는 다정한 말씀 한번 한적이 없고 제대로 모신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생각만 하면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자식이 새롭게 집을 지었다고 자랑삼아 연로하신 당숙을 모시고 집에 오신날 나는 인사만 꾸벅하고 분재만 다듬고 있었다. 40이 다된 나이인데 철이 그리도 없었을까, 나를 얼마나 사랑하신 당숙과 함께 오셨는데 평소 좋아 하시던 음식 한번 대접하지 못한것이 한이 되어 남는다. 아버지 불효자는 웁니다. 어리석은 아들 탓하지 마시고 부디 천국에서 복락 누리소서…….


저작권자 부안서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