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면 용서(龍西)마을
↑↑ 노인회장
안동복 ⓒ 부안서림신문 ↑↑ 이장 백종년 ⓒ 부안서림신문 ↑↑ 부녀회장
조인숙 ⓒ 부안서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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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리는 서쪽으로 산을 등지고 남북으로 변산의 동쪽 끝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뒷산은 골짜기마다 실개천을 이루어 큰비가 올때는 온마을이 물소리로 묻힐 정도라고 한다.
봄이면 살구꽃으로 화사했던 이 마을은 한때 90여 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32가구 80여명의 순수한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기도 하다.
동네의 이름은 원래 애곡리라 했는데 애곡리라 했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 마당바위 아랫마을에 사는 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고 돌아오는데 마당바위 앞에 오니 머리가 하얀 노인 둘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이상하기도 하고 바둑을 두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여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지났는지 한 노인이 “여보시오. 젊은이 구경 그만하고 어서 가 보시오”하는지라 나무꾼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데 짚고 있던 도낏자루가 다 썩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아랫마을로 내려왔는데 나무꾼이 살던 동네는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쑥대만 수북하더라는 것이다.
나무꾼은 하도 기가 막히고 원통하여 이리저리 다니면서 ‘애고 애고’ 울고 다녔다 한다.
그 뒤로 이곳 마을은 애곡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 강점기에 애곡리를 용서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확실한 문헌이 없어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뒷산에는 고사리, 버섯 등 산채가 고루 풍부하고 삼면으로는 들이 펼쳐져 있어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인심이 후했으며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웃 마을에서 물을 길어갈 정도로 식수 또한 풍부해서 일찍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라 한다.
마을 뒤 야산과 밭에는 고인돌과 그 후기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적석무덤이 훼손된채 여러개 남아 있기도 하다.
마을 북쪽(일명 서남댕)에 있는 고인돌에서는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칼이 출토되어 관심을 끌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인가와 떨어진 밭에서도 기왓조각이나 그릇 등의 파편이 출토되어 예전에 인가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성황당(서남댕)이라는 지명이 현재도 남아있어 가뭄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면민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 마을은 어느 곳보다도 종교가 일찍 들어와 해방 전부터 교회와 천도교 교당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1907년 김교주 등이 미국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교육시설이 없었던 당시 이 교회에 사립학교를 개설하여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개화초 많은 지식인을 배출하였고 지역 주민 의식구조와 실생활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 부안서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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