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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아름다운마무리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21.10.27 21:57 수정 2021.10.27 09:57

조덕연칼럼-아름다운마무리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부안서림신문 
코로나19, 너무도 긴 고통의 터널이다. 시장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다. 추석명절이 다가올 무렵 정부의 지원금이 지급되면서 반짝 활기를 찾는다. 가게 정돈하고 팔 물건 준비하느라 일손이 분주하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가게에 나와서 배달하고, 튀기고, 모처럼 활기차고, 바쁜시간을 보낼즈음 한통의 전화가 온다. 요양원이다. 얼마전 요양원에 모신 어머님이 낙상하시어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단다. 오빠한테 전화하니 알아서 하라한다. 오빠를 원망 할수도 없다. 지금껏 열심히 엄마의 병수발을 하며 집에서 모신분이다. 긴 병수발 효자이기를 포기할 정도의 시간이었음을 딸은 알고 있다. 요양원에 모시게 된것도 가족간의 협의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침대생활에 대소변 받아내고 섬망증(譫妄症)이 심해서 자식들을 모함하기 일쑤다. 자신의 돈을 며느리가 훔쳐갔다고 경찰에 신고하니 온 동네 시끄럽게 경찰이 조사한 적도 있다. 딸은 가게일 접고 요양원에 달려간다. 티벹 속담에 ‘내일이 먼저 올지 내생이 먼저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있다. 내일이 오기전에 죽을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와 가까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는 생활터전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었다. 열심히 살다가 나이들면 자연스럽게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면서 병원에서 기계에 의존한 삶을 살다보니 그걸 느끼는 현대인은 죽음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된다. 병원에서 남의 손에 의해 대소변 받아내는 삶이 삶일까? 그 수치스러움에 의한 스트레스 죽는것보다 못한 삶을 본인은 느끼지 못하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인공호흡기 착용하면 편할까? 자연스레히 내쉬던 숨을 기계에 유인된다면 그 고통은 얼마나클까,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살다가 명 다하면 병원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무리하는 삶, 그것이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정신이 있을 때 죽음이 다가오면 선택할수 있으나 섬망증이 오거나 불의의 사고로 정신이 없을 경우 선택할 권리없이 병원에 옮겨져 연명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의사는 거의 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이 회복될수 없다는걸, 그러나 진료할 수밖에 없다. 돈 때문이아니라 의사의 의무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간접살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전연명의료 의향서가 있다. 19세 이상 성인이면 보건소나 건강보험공단지사에 가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기준과 절차를 정립하여 환자가 사람으로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착용, 혈액투석, 항암제투여 등의 진료와 호스피스 이용을 선택하는 내용이 담겨져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는 사람들에게서 실제 일어난 결말에 의한 통계가 있다. 호스피스 병상에서 일반적인 영양공급과 통증을 조절하여 인공호흡이나 심폐소생술을 하지않은 환자는 4개월 후 사망했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환자는 3개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오래살고 싶은 사람은 10개월간 자리보전하며 살았다는 통계다. 아름다운 마무리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멀리있지않는 죽음, 자연스럽게 유서도 쓰고 사전연명 의향서도 작성하고, 무엇보다 가족과 아들딸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해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싶다. 효도하기위해 연명 치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효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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