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갑순 시인의 삶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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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서림신문 | |
우리고장 출신으로 전북권은 물론 수도권에서 시인으로 수필가로 활발한 문학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갑순 시인이 최근 동시집 ‘아빠가 배달돼요’를 펴내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욱이 지난 8일 한국문인협회 부안지부가 수여하는 부안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는 그동안 박 시인이 수상한 각종 크고작은 상중에 가장 값진 상이다. 고향이 수여한 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부안서림신문에서는 박 시인을 ‘독자와 만남’에 초대, 황현중(시인·평론가 / 현 임실우체국장) 향우를 통해 박 시인을 들여다본다.<편집자 글>
화사하고 들뜬 듯하면서도 정결하고 중후한 박갑순 시인은 늘 행복하고 넉넉한 미소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박 시인의 오랜 시간은, 행복한 얼굴이 아니라,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은 미래의 창을 절박하게 두드리며, 하루하루 공포와 극한의 고통에 맞서야 하는 ‘눈물의 민머리 시간’이었다. 2015년에 필자의 귀에 들이닥친 소식은 박 시인은 2014년 12월 위암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꽃망울 떨어질라』(2015. 신아출판사)는 위암 수술을 받은 직후, 어둡고 긴 생사의 터널을 막 지나 회복 중에 출간한 박 시인의 첫 수필집이다. 같은 이름의 표제작에는 그때 박 시인의 처지와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바람 앞에 속수무책 흔들리는 꽃들이 맥없이 세상에서 일탈 경로에 놓여버린 환자들 같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 같다. 난 내 자리에서 묵묵히 봄엔 맑은 꽃을 피우고 겨울엔 꽃 피울 준비하며 지내왔건만 병마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들이 암 선고를 받던 날의 나처럼 처량하다. 모든 약한 것들이 내 몸인 양만 싶다.
(중략)
지금 맺은 목련 망울은 어떤 빛깔의 꽃을 피워낼지는 모르겠다. 저 여린 망울이 되기까지 얼마나 긴 아픔의 강을 건너왔을까. 내가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오늘처럼 다시 세상을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건너 여기 있듯이, 이제 바람아 멈추어라. 여린 꽃망울 못 터트리겠다. 네가 멈추어야 내 삶에 휘몰아친 바람도 멎을 것이다. 활기찬 목련꽃이 자태를 드러내는 날 나 또한 툴툴 털고 삶의 이랑을 힘차게 달릴 수 있으리라.
- 「꽃망울 떨어질라」부분
꽃샘바람에 흔들리는 목련 꽃망울이 불안하다. 암 수술을 받고 겨우 버티며 흔들리고 있는 박 시인의 안쓰러운 처지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바람이 멈추어야 목련꽃이 활짝 피련만, 박 시인에게 휘몰아친 바람은 멎지 않았고, 박 시인의 꽃망울은 피지도 못한 채 다시 한 번 병상 위에 떨어져야 했다. 2017년 2월 박 시인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고 말해야 하나? 박 시인은 위암 수술과 회복의 와중에 낸 수필집에 이어, 유방암 투병 중에 또 첫 시집 『우리는 눈물을 연습한 적 없다』(2018. 6. 등대지기)를 출간했다. 박 시인의 말마따나 “책을 내겠다는 계획 때문에 아픈 건지, 아팠기 때문에 책을 내게 된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병상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시 덕분이었다. 절반의 시편이 병상에서 이를 악물고 절뚝거리며 쓴 시이다. 고통을 감싸안고 나뒹굴어야 하는 처참한 시간만이, 친친 동여매도 결코 감출 수 없는 붉은 얼룩만이 박 시인에게 시시각각 부딪혀 오는 삶의 전부였지만, 통증의 틈을 벌리고 캐낸 시어(詩語)들은 단지 아프다고만 하소연하지 않는다. 박 시인은 이제 고통을 견디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통을 껴안고 다독이고 다스리는 부드럽지만 완강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눈물을 연습한 적 없다// 이제/ 흐르는 눈물을 단호하게 닦는다// 그대와 나도 어느 순간/ 겹겹이 매운 맘을 품고 있다// 카페에도 밴드에도/ 곳곳에 쓰이는 양파처럼/ 웃고 있는 매운 맛// 맛있는 외식들은 대개 짜고 매워/ 삼삼한 맛집은 없다// 눈물로 화해하는 양파를 포기할 수 없어/ 오늘도 조리대 앞에서/ 매운 그녀와 실랑이 한다// 내게 매운 말로 쏘아대도/ 어느 결에 단맛으로 한몸이 되는
- 「양파」 전문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내는 박 시인의 완강한 결기를 느낀다. 그러나 이 ‘결기’는 고통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부정의 언어가 아니다. “웃고 있는 매운 맛”이라는 긍정적 인식이, 결국 극한의 고통을 “단맛으로 한몸”이 되게 했다. 그러므로 박 시인에게 ‘연습하는 눈물’이란 있을 수 없다. 박 시인의 영혼은 눈물로 켠 촛불이다. 자신을 태워 희망을 밝히는 ‘촛불의 눈물’이다.
박 시인은 이제 두 번의 수술을 마치고 병상에서 무사히 내려왔다. 그동안 박 시인이 절실하게 희망했던 일상으로 돌아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문학과 더불어, 수틀 위에 수를 놓듯 한 땀 두 땀 소중하고 의미 있는 하루하루의 삶을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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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인의 고통스러운 삶과 함께했던 문학 역시, 길고 긴 통증의 여정을 끝내고 성숙기로 접어들었다. 1998년 『자유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지도 어언 21년. 고통과 눈물, 몸부림으로 집적된 박 시인의 창작은, 자아의 벽을 넘어 독자들의 보편적 삶의 세계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한 편의 시와 글이 문학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적극적 개입이 있을 때 가능하다. 공감을 뛰어넘는 다의적(多義的) 해석과 논쟁의 지점에서 문학은 성장하고 문학으로 완성된다. 문학상이 그것을 전적으로 입증하는 바는 아니지만, 2018년에 (사)한국미래문화연구원의 미래문화상(문학 부문) 수상에 이어, 올해 10월에는 부안문학상에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의 뜨거운 몸부림과 거친 호흡으로 완성한 박 시인만의 독특한 창작물이 독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부안문학상의 경우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주는 상으로, 문학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문학을 꿈꾸고 청춘을 불사르며 고향의 문학적 저변을 확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특별하고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박 시인의 얼굴은 늘 차분하고 온화하다. 슬픔 속에 감도는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얼굴의 곳곳에 맑고 깨끗하고 순한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때로 활기에 넘치는 듯하지만, 활기를 단속하는 겸허한 절제미는 아픔에도 품격이 있음을 입증한다. 마음의 안쪽을 잘 다스리는 사람의 표정이 대개 그렇다. 그런 표정이 박 시인의 문학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독자들을 끌어안고 위로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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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인은 나이에 비해 질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친구들이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고 중학교로 향할 때, 어린 박 시인은 남의 집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젖을 먹이러 다녀야 했고, 어른 반몫의 품삯을 받고 모내기를 해야 하는 가난하고 척박한 유년을 보냈다. 그러나 박 시인은 목 놓아 우는 대신 문학을 꿈꾸었다. 문학 속에서라면 가난의 고통쯤이야 오독오독 씹어 소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며,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동생의 돌연한 죽음, 이혼과 재혼, 두 번의 암 수술까지, 녹록치 않은 삶의 파랑 속에서도 박 시인은 문학을 늘 곁에 두었고, 문학으로 자신의 가난하고 아픈 삶을 채우고 치유했다. 박 시인의 문학은 화려한 이미지나 심오한 상징의 문학이 아니다. 박 시인의 진솔한 삶만이 그에게 유일한 문학의 대상이자 태반(胎盤)이다. 온몸의 문학, 온몸으로 밀고나간 문학이다. 그래서 박 시인은 눈으로 울지 않고 온몸으로 운다. 박 시인의 문학은 온몸의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