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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도전과 스피드로 세계최강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9.09.10 22:13 수정 2019.09.10 10:13

조덕연칼럼-도전과 스피드로 세계최강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부안서림신문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은 누구나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 할 권리가 있다” 1776년 7월 4일,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한 미국독립선언문의 요지다. 지금부터 243년 전 우리나라역사에 비춰보면 조선도 22대 정조원년이다. 미국인들은 대영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시도 속에 비폭력적 항의를 시도 하였고, 독립국가가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고 연방 정부를 수립한때가 1776년부터 1789년 4년에 걸친 노력이었다. 미국헌법은 1789년 제정 되어 지금도 유효하다. 1776년 버지니주아를 비롯한 13개주 대표가 모여 독립을 허가 받을 당시 미국의 인구는 불과 240만명 영토는 40만㎢에 불과 했으나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 1990년 이후 939만㎢ 인구 2억 8500만명의 거대한 나라로, 그것도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최강국을 만들어 냈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에 탑승한 청교도인 102명이 도착한 곳은 뉴잉글랜드였다. 청교도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 맞서 종교개혁을 철저히 실천하려는 프로테스탄트의 각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 행위를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이때의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을 거쳐 광해가 집권 한지 13년 되는 해다. 미국이 새로운 도전을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도움이 컸다. 1778년 군사원조와 차관제공 동맹을 맺은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고 미국을 전폭 지원했다. 그 시대 세계 각국의 외교 전략을 가까운 나라는 원수이고 먼 나라는 우방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철천지원수 지간으로 수시로 전쟁했으며, 사사건건 시비가 많은 나라였다.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승낙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 역시 프랑스 때문이었다. 미국을 치려면 프랑스가 나서니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 미국은 프랑스에 루이지에나주를 준다. 그러나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이 나폴레옹을 방문 먼 곳에 땅을 두면 관리하기도 힘들고 당시 프랑스는 전쟁 중이었기에 1,500만불에 사들인다. 미국은 역시 땅뺏기 선수다. 알래스카 또한 1867년에 720만불을 주고 러시아로부터 사들여 미국의 49번째 주로 만든다. 알래스카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금, 아연, 구리, 모래, 자갈 주요 광산물이 풍부해서 미국을 부로 이루는데 공헌한 곳이다. 독립한지 200년이 되는 무렵 미국은 세계최강에 우뚝 서서 세계인들을 호령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고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1789년부터 1865년까지 추진한 서진운동이다. 건국초기 해밀톤과 제퍼슨의 기본정책은 잉글랜드에서 시작 된 산업혁명과 대서양 연안에서 시작 된 산업혁명으로 많은 물자를 생산하였고, 수많은 이민자를 차별 없이 받아들여 서진운동을 벌여 영토 확장을 해나갔다. 서진운동은 미국의 본토 국경선내에서 일어난 유럽인의 이주운동이다. 개척자들의 물결이 끊임없이 서쪽으로 몰려들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이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고, 골드러시와 남북전쟁 사이에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모여 들었다. 미국은 이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개척한 땅의 반절을 그들에게 주었다. 매년 10만 명이상의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서부의 불모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1865년 남북전쟁이 종결 되자 재건의 시대에 돌입한다. 택지법(홈스테드법)을 실행 수많은 이민자에게 농장과 택지를 무상공급하고 수입관세를 올리고 공산품소비세를 면제하여 모든 공공 토지를 민간에게 넘겨 사유 재산 함으로 관리비를 줄이고 더 많은 소득을 창출할 수 있었으며 스페인과 전쟁승리로 많은 해외식민지를 얻어 노동력을 확보 할 수 있었다. 1929년 대공항 모든 생산품은 쓰레기 더미, 모든 실직자는 노숙자, 한마디로 폐허였다. 뉴딜정책이 위기를 조정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그는 미국의 구세주였다. 그의 핵심정책은 위기와 조정 노사관계 조정, 기업과 기업 간 조정 국가와 기업 간 조정 사회각층 불균형 해소 1933년 3월에 취임한 루즈벨트는 1930년 대공항에서 미국을 구해줬고 세계패권을 차지하는데 필요한 정치, 경제적 기반을 마련 해 주었다. 그의 정책이 성공한 원인은 강력한 리더십 지식과 정보, 그리고 친근한 대통령의 이미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야 할 것은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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