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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지금부터 2560여년전인 춘추시기 말기에 노나라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의 공족이었으나 멸망하여 공자의 증조부때 노나라로 옮겨왔고. 어렸을때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였으며, 30세쯤 되어 관리로서 직위를 얻고 학문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36세때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갔으나 제나라에서 배척되고 송나라와 위나라에서 쫓겨나고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궁에 빠지다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52세때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외교관도 겸하였으며, 55세때 노나라를 떠나 대여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자기를 등용해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10년에 걸친 방랑 생활이 공자에겐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으며 만년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힘을쓰다 72세되는 해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論語)라는 책을 저술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2000년을 넘게 이어오며 중원과 동북아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어왔다.
만년의 공자는 논어의 위정편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서른에 자립하였고(以立) 마흔살에는 세상에 현혹되지 않았고(不惑) 쉰살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知天命) 예순살에는 듣는데로 모든 것을 순조롭게 이해하게 되었고(耳順) 칠십이 되어서는 마음 내키는데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從心所欲不踰矩). 성인(聖人)에 이른것이다.
그가 죽고난후 당나라 현종은 문선왕의 시호를,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고, 원나라에 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이 되었고,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대성지성문선선사의 칭호가 수여 되었다.
공자는 유가 철학과 유교의 시조인 고대 중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를 보면 공자의 키가 9척6촌(약288㎝)으로 장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있다. 9척6촌의 장신인 공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미국 프로 농구 협회인 NBA의 30개 구단주가 가만있질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학문에 뜻을 두었던 15세 이전에 스카웃 열기가 거세어 그는 농구에 인생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88㎝의 키라면 앉아서도 덩크슛을 할 정도의 장신의 소유자 이었으니 말이다.
농구하면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을 빼놓을수없다.
1963년생인 그의 키는 198㎝, 1984년 시카고불스에 입단할 때만해도 그는 공항에서 구단까지 가는 택시비가 없어 사정하는 가난뱅이였다.
조던이 시카고불스에서 뛰던 마지막 연봉이 코트밖 부수입까지 합하면 우리 돈으로 662억원이었고 은퇴한지 8년이 지난 지금도 광고 수입등을 통해 작년한해 수입이 약 703억원을 벌었으며 그의 재산이 8000억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세계의 부자 위치에 있는것이다.
공자의 키 9척6촌, 약288㎝(공자세가의 기록)의 계산이 맞는 것일까?
세계의 최장신 기록을 보면 1918년 미국에서 태어나 나이 22세에 세상을 떠난 로버트 퍼싱와들러우가 272㎝였고, 현존하는 사람으로는 터키의 술탄코젠이 246㎝라고 기록된걸 보면 가능한 수치이기는 하다. 북한의 농구감독 리명훈도 235㎝다. 그러나 공자의 키에는 척근법의 적용이 잘못된 듯싶다. 척(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 문자이며 처음에는 한뼘(1尺)을 18㎝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2년부터 30,3㎝로 통용 되었던 기록을 볼때 공자의 9척6촌은 그 시대의 尺을 적용한다면 180㎝정도가 아니었나싶다.
현실에서 인간의 삶을 중시한 공자의 교육사상은 군군신신부부자자(郡君臣臣父父子子)다. 자기본분에 맞게 행동하고 책임을 중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