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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피니언 칼럼-서림춘추

조덕연칼럼- 어느 죽음

서림신문 기자 입력 2010.03.18 13:14 수정 2010.03.18 01:24

 
↑↑ 조 덕 연 서림신문 논설위원
ⓒ 디지털 부안일보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충무공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있는 말이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그를 잊지 못하고 있음은 그의 삶이 의로웠기 때문이다. 일생을 살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 곧은 모습이었고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권력자에게도 굴하지 않고 실천하였기에 투옥도 되었지만 그는 굽히지 않는다. 거북선을 비롯 여러 가지 무기들을 제작하여 1592년 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7년간의 끈질긴 왜적의 침입에 대항한 바다전쟁에서 23전 23승의 불패신화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이다. 이순신은 돌아갈 곳이 없다. 그는 왕으로부터 면사첩(免死帖)을 받은 죄인이다. 면사첩은 죽어 마땅 하지만 죽이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에게서는 면사라는 말조차 거두어져야만 삶이 확보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왕이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죽임 당하지 않고 당리당략에 희생양이 될게 뻔한데 그 생을 유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7년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후 갑옷을 벗고 적의 유탄을 청하여 장렬하게 생을 마감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이순신은 조선시대의 명장으로 세계 해전사에 신화로 남겨진 필승의 제독이다.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기틀을 다진 개혁가로 거북선과 학익진의 해전 원리를 창안한 전략 전술가로 평가되며 세번의 파직과 두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시련을 이겨내고 임진왜란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우리나라를 지켜낸 위대한 분이다. 그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서른 둘의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한 늦깍이다. 14년동안 변방에서 말단 수비장교로 떠돌다가 일본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때에 마흔 일곱의 나이에 제독이 된다.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배앗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고,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나라의 지원없이 각종모함과 질시속에 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조성하고, 스스로 거북선을 만들었고, 스스로 각종 화기를 제작하여 오합지졸인 수병을 조련하여 마지막 전투에서는 12척의 배로 500척에 가까운 적을 섬멸한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무적함대인 극동함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일본의 ‘도고 헤이 하치로’ 제독은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의 자리에서 영국의 넬슨제독과 조선의 이순신제독에 버금가는 제독으로 평가하는 기자에게 “나를 이순신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순신제독은 전쟁에 관한한 신의 경지에 이른 분이다. 이순신제독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제독이다”로 평가했다. 1545년 3월 8일에 태어나 1598년 11월19일에 퇴각하는 일본군 4만명과 왜선 450척을 섬멸하고 장렬하게 죽음의 길을 택한 이순신장군. 1604년에 그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1643년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93년 영의정에 추증된다. 우리가 지금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생애가 오직 나라를 위한 일생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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